04.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어, 이런 거. 그래, 당신에게도.
카이토는 자신의 맞은편에 널부러져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며칠전 대학 교정에서 생각지도 않게 마주친 고교시절의 동급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느날 영국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소식과 함께 더이상 학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상대방이 어째서 현재 영국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대학의 학생이 되어있는건진 의문이었지만. 그러나 악수를 청하며 오랜만에 만난 기념으로 술이나 한 잔 하자는 상대의 제안에 응했던게 실수였다. 설마 꼬드긴 장본인이 자신보다 먼저 뻗어버릴 줄이야! 영업마감시간 10분전을 가리키는 시계를 바라보고 한숨을 쉬던 카이토는 옴짝달싹도 안하는 상대방의 어깨를 다시한번 흔들어보았다. 무엇보다 술값을 쏜다고 한 당사자가 저래서야 땡전 한 푼 없는 자신의 주머니사정이 곤란하다.
"야, 일어나."
"......"
"일어나라고, 이자식아! 아니 제발 일어나 주세요....부탁이니까 좀 일어나라니까!!!!"
"....."
아, 이시점에서 깨우기는 도저히 무리다. 단념하고 계산서를 가져온 종업원에게 자신의 학생증과 신분증을 맡기며 사정사정해서 겨우 외상을 얻어낸 카이토는 고교와 아마도 대학동창까지 될 녀석의 한쪽팔을 어깨에 들쳐메고 1월의 밤거리로 나섰다. 갑자기 느껴지는 제법 쌀쌀한 밤바람 때문에 옆사람의 체온이 0.01초쯤 고맙게 느껴진 것도 잠시, 자신을 이지경으로 만든 원흉을 어디에 버려야 분이 풀릴지 고민에 빠졌다. 심정같아선 당장이라도 부축하고있는 팔을 확 놔버리고 싶었지만 요즘같은 계절에 길바닥에 방치했다간 동사할지도 모를 일이었고 근처 모텔에 처박아두기엔 아쉽게도 모텔보단 자신의 원룸쪽이 더 가까웠다. 결국 카이토는 원룸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도덕적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취미생활 때문에 왠만한 무게엔 단련되있음에도 불구하고, 술에 취한 남자의 축 처진 몸무게는 상상이상으로 중력감이 있어서 이마에 저절로 땀방울이 맺혔다. 자신보다 6센티는 더 큰 몸을 질질 끌다시피 운반해 원룸의 침대에 내려놓았지만 이런 자신의 수고를 알아주긴 커녕 세상모르고 숙면을 취하고있는 모양새가 괘씸하기 그지없다. 카이토는 녀석의 엉덩이를 냅따 차버리고는 만들어진 빈공간에 비집고 들어가 이불을 덮었다. 옆사람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듯 했으나 뭔지 알 게 뭐야...무언가가 이불속으로 파고드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뒤늦은 알콜기로 급속히 희미해져가는 의식을 되돌리기엔 모든게 너무나 귀찮았다. 카이토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
자신과 한이불을 덮고있는 사람이 잠에서 깨지않도록 주의하면서 하쿠바는 살그머니 몸의 방향을 반대로 틀었다. 사실 숙취야 이곳으로 오는 길에 어렴풋이 깨있었던 상태였지만 그 때 곧이곧대로 입을 열었다간 보기좋게 대로변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을 터였다. 실제로 방 문지방을 넘자마자 방주인은 자신에게 이불을 펴주는 아량을 베품과 동시에 근사히 엉덩이를 걷어차버리지 않았던가. 그래도 옛 고교동창이 술에 쩔은 채 길에서 객사할까봐 염려되서 데려온 주제에...과연 세상만사에 오지랖쩌는 키드답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도감에 하쿠바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제는 완벽히 술이 깨버린 것을 핑계로 하쿠바는 눈 앞에 잠들어있는 청년과 소년의 경계쯤에 머물러 있는듯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둠에 잠겨 반쯤은 보이지않는 상대방의 얼굴은 자신이 기억하고있는 달빛 아래의 모습보다 훨씬 어리고 창백해 보였다. 그렇게나 태양처럼 에너지가 넘쳤던 남자의 실체가 이정도로 작고 말랐었나? 움직임에 예민할텐데도 죽은듯 눈을 감고있는 카이토의 모습은 흡사 못 본 동안에 이름모를 병에 걸린건 아닐까란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마치 고등학교 2학년이란 과거의 시간대에 기억을 묶은 채 매일 아쉬움과 후회를 곱씹으며 아파했던 어제까지의 하쿠바 자신처럼.
있잖습니까 쿠로바군, 2년전 내가 전학가버려서 넌 속이 후련했겠지만 난 조금은 네가 보고싶었습니다. 아니, 실은 상당히. 전학가기 전날 학교옥상에서 낮잠에 빠져있던 너에게 충동적으로 입을 맞췄던 것, 넌 절대 알 수 없을테지. 너와 키드를 볼 때마다 점점 변해가는 나자신을 용납할 수 없어서 더이상 이곳에 있을수가 없었어. 무엇보다ㅡ
'네 가슴속엔 여전히 그녀가 있겠지'
갑자기 왼쪽 가슴이 뻐근히 아파왔다. 넌 여전히 내생각따위 눈꼽만큼도 안하고 있을테지. 네 그 일이 끝나면 소꼽친구인 그녀와 해피엔딩으로 인생을 마무리짓고 싶을테지. 그래요, 나도 여자를 울리는건 내 사고에 어긋나므로 싫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쿠로바인 널 가진다면 난 괴도키드인 널 어떻게든 손에 넣겠어. 그러니까 날 봐, 날 인정해. 하쿠바는 이불 속의 팔을 움직여 옆사람의 손을 가만히 잡고서 자신의 입술에 그의 손바닥을 가져다대었다. 옛날과 변함없이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쿠로바 카이토의 체온이 자신에게 옮겨지길 혹은 그 반대가 되길 바라면서.
ㅡㅡㅡㅡㅡㅡ
뜬금없는 대학배경. 같은 대학 아마도 다른과.